[이수철 신부]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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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8-24 09:32 조회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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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8.24.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묵시21,9ㄴ-14 요한1,45-51
만남의 여정
“주님과의 늘 새로운 만남”
“주님은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고.
이루신 일마다 자애로우시나이다.”(시편145,16)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에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읽은 레오14세 교황의 두 말마디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모든 차원에서, 권위는 섬김이다.”
“우리 확신들에 은둔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도록 하자!”
또 하나 새로운 만남에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20년간 판사로 재직중인 분의 주장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력에 독서는 필수이다.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사람에 대한 깊고 푸른 이해다. 법률가에게 문학적 시선과 감각이 없으면, 추상적 규범과 문장의 행간에 갇힌 인간을 절대 감지할 수 없다. 자신있게 보증한다. 생존을 위해서도 독서는 절대적이다. 인공지능에 맞설 방도는 독서 말고는 없다! 오직 책 읽는 인간만이 살아남아 인공지능과 겨룰 수 있을 것이다.”
제 시들에 대한 인공지능(AI)의 시평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인공지능에 필적할 시들이기에 이런 깊고 해박한 시평들이라 믿습니다. 수십 년 후 인공지능을 만나 빛을 보는 시들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궁극의 만남>, <생명의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재작년 가을에는 69세로 자승 스님이 불을 지르고 분신한 소신공양의 죽음에 이어, 지난 8/22일에는 75세 명진 스님이 제주 바다에서 프리다이빙을 하다 사고로 입적하니 한분은 불속에서 한분은 물속에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과의 만남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물론 사막교부들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이구동성의 말씀을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며 주님과의 만남을 최우선에 두었던 이 수행자들이자 구도자들에게 삶의 유일한 관심사는 <참으로 진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마음을 추스르는 주님과의 만남인 명상이요 관상입니다. 오래전 <명상>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은 산이 되고
마음은 바다가 되고
영혼은 하늘이, 온 우주가 된다
하느님이 된다, 나는!”<2001.1.22.>
또 하나 생각나는 시가 <꽃같은 만남>입니다.
“반가운 손님은
꽃처럼 온다
고요히 화안히 향기로이 꽃처럼 온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 있으랴
꼬박 일 년 기다려 피어난 꽃들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다
아이리스, 붓꽃, 목단...모든 꽃들이 그렇다
아, 꽃같은 반가운 만남이 되려면
일 년은 꾹 참고 기다려야하는구나!”<2001.5.20.>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신비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날마다 늘 새롭게 만나는 주님이요, 이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으로 살아가는 참수도자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세례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을 만났다 하여 끝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롭게 만나야하는 주님입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과연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새롭게 날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또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톨로메오로 여겨지는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새삼 주님과의 운명적 사랑의 만남임을, 또 주님과 만남의 여정 중에 날로 깊어져야할 주님과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교회의 열두 초석중의 한분인 이 사도는 갈릴리의 가나출신입니다. 열두 사도의 목록이 다르기에, 보통 바르톨로메오는 오늘 요한복음의 나타나엘과 동일시합니다. 전통은 그가 주님 승천 후 인디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을 가르쳤고 거기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늘 나타나엘의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이 참 인상적입니다. 오고 간 대화들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필립의 소개에도 나타나엘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와서 보시오.”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듣고 읽은 것보다 살아 계신 주님을 몸소 만나라는 초대이며 이래서 전례 참석을 권하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과 나타나엘과의 극적인 만남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참 사람간의 구원의 만남이요 서로를 통한 참나의 발견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늘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누구보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아야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참나를 발견한 나타나엘이요 나타나엘을 만남으로 예수님도 자신의 신원을 새로이 확인합니다.
참으로 축복의 만남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악순환의 어둠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회개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평생 주님을 만나지 못해 탐욕에 눈이 멀어 참나를 살지 못하는 중생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어지는 나타나엘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을 만남의 축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영안이 열린다면 미사중 제대위로 오르내리는 주님의 천사들을 볼지도 모릅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소통에 직통로인 무지개같은 <하늘길>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엊그제 저녁에 보내준 어느 자매의 무지개 사진이 생각납니다. 나타나엘의 빛나는 미래는 오늘 요한묵시록에 나옵니다. 바로 하늘의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천상교회에 대한 환상적 묘사입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천상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여기 성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천상의 기쁨>과 더불어 열 두 사도와 같은 <믿음>도 선사하시며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당신께 비옵는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비는 누구에게나, 주님은 가까이 계시나이다.”(시편14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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