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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신부] 26.08.13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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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8-13 08:53 조회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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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8.13.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에제12,1-12 마태18,21-19,1

 


하닮의 여정, 자비의 여정

“온전한 삶”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시편119,135)

 

본말전도의 삶이 삶을 복잡하게 하고 바쁘게 합니다. 본말전도의 수렁에 빠지면 일중독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본질에 충실할 때 주님을 만나고 삶은 단순하고 아름다워지며 넉넉해집니다. 그러니 본질에 충실함이 지혜입니다. 

 

엊그제 건축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건축; 복잡하고 어려우며 책임질 일도 많다”라는 말에 즉시 <인생 건축>이란 말마디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삶은 건축처럼 복잡하고 어려워 책임질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본질에 충실하면서 최소한의 필요로 단순하고 넉넉한 내적 삶을 살아가도록 깨어 노력함이 지혜입니다.

 

때로 수도원 자연의 넉넉한 품이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 같아 배우는 마음이 됩니다. 아주 오래 전 써놓은 두 편의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의도적으로 강론 때 마다 인용하는 시입니다.

 

‘화창한 봄날의 수도원

 평화롭기가

 고향의 품, 하느님의 품같다

 어느 두 형제님들 오렌지와 과자만 달랑 내놓고

 길가 잔디밭 위에서 조용히 정담을 나눈다

 분위기가 잘 어울려 

 “참 좋은 명당에 자리 잡으셨네요.”

 지나다 웃으며 말 부치니

 “헤, 헤, 예....”

 아이들처럼 착하게 웃는다.'<하느님의 품;2005.4. >

 

예전에는 수도원 자연 곳곳에서 이런 평화로운 모습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삭막해질수록 하느님의 넉넉한 품으로 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수도원 친정집에 온 것 같다며 또 제가 친정집 아버지 같다는 말도 간혹 듣곤 하는 데, 아버지의 집의 주인인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시입니다.

 

“맑은 물에 고기가 살지 못 한다 하지 않나?

 삶이 투명할 수만은 없다

 그늘도 빈틈도 있어야 머물다 갈 수 있는 법이다

 마냥 환하고 빡빡하다면 어디서 

 쉴 수 있겠는가?

 쉬지도 살지도 못한다

 사랑love이 호수라면 연민compassion은 바다다 

 독일의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말이다

 사람 사랑이 호수라면 하느님 사랑은 끝없는 연민의 바다다

 그늘도 빈틈도 많은 하느님이시다

 아침, 저녁, 아니 늘 연민의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자주 바라볼 일이다

 성숙이란 결국 ‘연민의 바다’가 

 드넓고 깊은 ‘자비의 바다’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한없이 넓고 깊은 하느님의 바다가!”<하느님의 바다; 2005.8. >

 

이런 넉넉하고 지혜로우 하느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이나 재앙은 거의 대부분 무지의 병에서 자초한 것입니다. 무지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눈 멀면 결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하지 못합니다.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해와 착각을 진실인 듯 여깁니다. 참으로 눈뜬 무지의 맹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이래서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이요, 하느님의 제자리에 돌아가는 끊임없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하고 순수한 참 나의 마음이 될 때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두 상징적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 주지만 무지에 눈먼 이들은 이를 깨닫지 못해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맙니다. 상징적 두 행위 전 주님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는 듯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자기 확신의 신념이란 무지에 눈 멀면, 이런 똑똑한 바보들에게 회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자비하고 지혜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는 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확연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무수히,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기에, 사랑받고 있기에 베드로에게 주신 주님의 답처럼 무한한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가 상징하는 바 아주 깊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은혜를 까맣게 잊었기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잊었기에 이토록 이웃에게 인색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자비하신 아버지께 빚진 무한한 <사랑의 빚>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동료에게 무자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병이 치명적입니다.

 

매정한 주인의 무자비한 처사를 보면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입니다. 인생광야여정 자비하고 지혜로운 아버지를 잊고 살면 세상 우상들에 눈 멀고 미치고 중독되어 괴물이나 야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부단한 회개를 통해 자비하고 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갈 때 온전한 참 나의 실현이요  성인聖人입니다. 주님을 닮아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성소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지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참으로 자비하고 지혜로운 주님을 닮아가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된 회개를 통해 참 나의 겸손하고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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