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신부] 26.1.16 연중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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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1-16 08:58 조회3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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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6.연중 제1주간 금요일
1사무 8,4-7.10-22ㄱ 마르 2,1-12
믿음의 힘
“믿음의 치유, 하느님 나라의 실현”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시편89,16)
믿음의 힘이 진정한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의 힘, 말씀의 힘은 모두 믿음의 힘으로 모아집니다. 영육의 치유에도 믿음이 답이자 약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청할 바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것도 믿음뿐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믿음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공부는 감정과 욕심에 빠져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다산>
믿음 공부 역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안회가 배움을 좋아해서 화를 옮기지 않고 허물을 고치는데 망설이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단명했습니다.’”<논어>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 사도는 장수로 천수를 누렸지만 공자의 애제자 안회는 단명했습니다.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는바 믿음입니다. 엊그제 레오 교황의 삼종기도후 가르침도 믿음 공부에 유익했습니다.
“바티칸 2차 공의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우정(friendship with Christ)’을 요구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아들들로 딸들로 만든다. 날마다 기도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이란 말마디가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의 여정과 함께 가는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로 신원에 걸맞는 삶에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는 너무나 절대적 요소입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에는 영원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복음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주목할바 예수님께는 병을 고치시기에 앞서 가르치시는 일이 늘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예수님이요 언제나 말씀 공부에 전념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치유에도 예수님은 집문앞에 모여든 많은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 말씀을 전하신후 데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명 동료들의 활약이 참으로 간절하고 절박하니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궁즉통이라 했습니다.
절박한 한계 상황에서 예수님께 접근이 불가능하자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은 놀라운 순발력으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 친구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냅니다. 이들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한 주님의 지체없는 용서의 선언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모든 병의 근원이 죄에서 시작됨을 직시하신 주님은 이들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근원적 치유인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죄의 용서에 이어 중풍병의 치유를 선언하시니 참 통괘한 영육의 전인적 치유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가거라.”
죄의 용서에 이어 육신의 치유를 가능하게 한 믿음의 힘입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동료들 믿음의 힘은 참 컸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해도 교회공동체의 믿음의 힘은 참으로 크며 이 거룩한 공동전례 미사의 힘은 우리의 약한 믿음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래서 저는 미사시 영성체전 다음 경문기도를 참 좋아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어제 복음의 나병환자와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필리스티아인들에 참패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듯,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의 네 동료들의 믿음과, 제1독서 사무엘상권의 이스라엘 원로들의 믿음이 역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흡사 사무엘이 이상주의자같다면 이스라엘 원로들은 현실주의자같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정제도의 폐해를 열렬히 설파하며 이들을 설득합니다만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처절한 패배를 목격한 이들은 요지부동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봐도 백성들을 노예화하는 왕정제도는 수없이 목격됩니다. 다윗같은, 우리의 세종대왕같은 성왕(聖王)이나 성군(聖君)은 하늘에 별따기처럼 행운에 속합니다. 사실 웬만한 자비와 지혜의 성군이 아니곤 왕권과 신권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도 지극히 힘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왕으로 모신 믿음이 제일입니다만, 하느님도 사무엘도 왕정제도를 고집하는 현실주의자들인 이스라엘 원로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하느님은 안타깝지만 이들의 청을 들어주실 수 뿐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왕정제도는 현실이요 믿음은 이상처럼 생각됐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짜 임금인 하느님을 놔두고 사람 임금을 원하는 현실주의자들! 결국은 하느님 믿음 부족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설파한 하느님이 임금인 하느님의 나라가 왕정제도에 대한 유일한 해법이지만, 하느님은 믿음 부족한 이들의 현실을 고려하여 사무엘을 통해 어쩔수 없이 이들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어라.”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주님과 함께 현실주의를 넘어 한결같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왕이신 하느님 나라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우리는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시편89,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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