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신부] 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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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1-23 08:43 조회2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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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1사무24,3-21 마르3,13-19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늘 가꾸고 돌봐야할 성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영혼 당신께 숨나이다.”(시편57,2ㄱ)
몹시 추운 겨울 새벽입니다. 겨울 추위를 이기는 봄꿈입니다. 새벽 산책 기도중 저절로 찾아 온 <봄꿈>이란 시가 용기백배 힘을 줬습니다.
"봄은
겨울에서 온다
죽음같은
겨울 추위중에
피어나는
부활의 봄꿈이
겨울 추위를
이겼다"<202.1.23 새벽>
불가에서는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인생사고(人生四苦)라 부릅니다. 삶도 늙음도 병듬도 죽음도 고통인 인생이라는, 즉 고해(苦海)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부탁받은 두 기도 내용도 계속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아침미사는 다음 두분을 위해 봉헌합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한 자매를 의탁합니다. 유방암 뼈속까지 전이되어 아주 위독합니다. 물도 잘 못마시고 병자성사 받은 상태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3명입니다. 신부님, 수사님들 기도부탁드립니다.”
“신부님, 딸이 학교 일이 너무 힘들다고 그만 둘수는 없고 죽고 싶다고 합니다...저도 딱히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저 기도할 따름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답은 기도뿐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자세와 더불어 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자주 강조하는 축제인생이지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은 고해인생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나름대로 힘겹게 고단한 인생들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묻게 되는 근본적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용기를 내어,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기도하며 감사하며 기쁘게 축제인생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고해인생중에도 축제인생을 살아가는 거룩하고 지혜로운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다시 읽어보는 행복기도 두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는
복음선포의 꽃자리 지상천국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요 믿음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새롭게 확인 점검하게 되는 우리의 성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예외없이 산을 찾았던 주님은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 열둘을 불러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십니다.
열둘을 뽑으시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셨음은 물론이겠습니다. 당신을 따르며 배우던 제자들중 열둘을 불러 당신의 일을 나눌 사도를 뽑으십니다. 여기서 알게 되는 우리의 성소와 신원입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소이자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처럼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요 이에 응답한 우리들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가 우리의 성소이자 이중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들의 면면이 개성들 뚜렷하기가 총천연색 사진처럼 참 다양하고 풍부해 보입니다. 도저히 함께의 공동체를 이루기 힘든 사도들입니다. 새삼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다양성의 일치의 제자들이자 사도들의 공동체임을 깨닫게 되며 교회의 원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바로 이 열두 사도중,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로 묘사되는 마지막 인물이 우리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예수님의 실수인가? 도대체 왜 이런 유다를 뽑으셨을까?’ 그러나 이런 성소의 신비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의 성소를 끊임없이 재정비, 리모델링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무이한 귀한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평생 늘 돌보고 가꿔야할 우리의 성소입니다. 저절로의 성소가 아니라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성소의 불 꺼져 성소를 잃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렇듯 성소를 잃음은 절대로 하느님 탓이 아닌 내 탓입니다.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가 그 적절한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사도로 불러 주신 성소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여,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늘 기도와 사랑, 회개의 삶에 충실했다면 이런 불행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사무엘 상권에서 만나는 사울과 다윗이 우리 성소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이미 하느님의 신뢰를 잃은 사울과 하느님의 총애중 승승장구하는 다윗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줄기차게 자기 목숨을 쫓는 사울에 한없이 관대한 다윗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다윗과 비교하면 사울의 성소관리는 너무 허술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보이지 않고 다윗에게처럼 주님 사랑과 기도, 회개의 삶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자기 성소를 전혀 가꾸고 돌보지 않았기에,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질투의 무지의 포로가 되어 자기를 잃고 스스로 무너지니 자업자득입니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자기를 파괴하는 내부의 적 질투심입니다.
누구 탓도 아닌 자기 탓입니다. 도대체 사울에게는 생존에 급급할 뿐, 사랑과 기도, 그리고 회개로 입증되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면 사울은 주님과 무관한, 심지어 상관없는 남남의 관계처럼 느껴집니다.
참으로 우리의 성소에 반면교사가 되는 복음의 배반자 유다와 사무엘상권의 사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면서, <기도와 사랑, 회개의 삶>에 충실하므로, 늘 주님을 보고 배우며 자신의 성소를 돌보고 가꿨을 나머지 사도들이요 다윗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늘 가꾸고 돌봐야 할 우리의 성소입니다. 이렇게 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총으로 고해인생중에도 축제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성소를 지켜 주시며 우리 모두 축제인생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높직이 하늘 위에 주님 나타나소서
온 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57,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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