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신부] 26.03.05 사순 제2주간 목요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3-05 09:07 조회17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2026.3.5.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 17,5-10 루카 16,19-31
회개의 표징, 회개의 여정
“회개가 답이다.”
“하느님, 저를 꿰뚫어 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시편139,24)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은총이자 회개의 선택이요 회개의 노력입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회개의 열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회개의 표징들이요 성사(聖事)들입니다.
오늘 독서나 복음 말씀도 궁극으로 의도하는바 우리의 회개입니다.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들여다 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도 심오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부자 역시 별종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주목할 바 부자는 이름이 없고 라자로는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그저 부자일뿐, 실제로 그는 모든 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He is a nobody)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앞에 존재감 전무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무와 같은 존재가 하느님 없이 사는 부자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재물이, 돈이 자리합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했다.’
아주 한폭의 그림처럼 적나라한 대조가 인상적입니다. 이름이 없는 어떤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가난한 이에게 잘 들어맞는 라자로라는 이름입니다. 비유중에 이름이 있는 경우는 유일합니다.
그러니 부자집 대문 앞에 라자로는 부자에게 주어진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 구원의 출구요, 회개하라 주어진 구원의 시험 문제 였던 것입니다. 정말 부자가 회개했다면 라자로와 함께 나눴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 곁의 라자로는 누구인지 두루 살펴 보게 합니다. 대문 앞의 가난한 라자로는 학대받지도 않았고, 쫓겨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As if he did not exist) 무시되었습니다.
부자에게 라자로는 사람이 아닌 개와 돼지, 또는 무의미한, 존재감 전무의 <하나의 사물>같았을지도 모릅니다. 비인간화 절정의 부자요 참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생각없는, 영혼없는 부자는, 존재의 깊이가 전혀없는 순전히 욕망 충족으로 만족하는 피상적 부자는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무관심의 대죄입니다. 이 둘의 대비를 잘 보여 주는 예레미야서 제1독서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대로 관계 전무의 고립단절의 부자의 황량한 내면 상태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천국같은 외적 환경인데 내적으로는 지옥입니다. 새삼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라기 보다는 <관계>에 달렸음을 봅니다. 아무리 천국같은 자연환경도 고립단절의 삶이라면 지옥입니다. 반면 다음 묘사는 가난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정말 누가 진짜 행복한 부자인지 묻게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은 어느쪽입니까? 행복은 선택입니다. 어느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많이 지녀서가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마침내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자가 참부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언자의 탄식은 그대로 하느님의 탄식을 반영한다 싶습니다. 무지의 악입니다. 그대로 무지의 악한 우리 인간을 두고 하시는 보편성을 지닌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이 말씀 또한 회개의 절박성을 깨닫게 합니다. 결코 인간 악에 놀라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의 경우 부에 중독 노예된 결과 인간성 자체의 상실입니다. 기도하라, 사랑하라, 회개하라, 공부하라, 숙제하라, 보속하라, 주어진 인생임을, 연장되는 날들임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몰랐습니다. 죽으면 이 모두가 끝입니다. 세상을 떠난 부자에게 이미 후회해도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It is now too late!).
복음 후반부는 둘의 상황이 정 반대로 반전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살아 생전의 내면 모습이 완전히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두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사후 라자로쪽의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죽음으로 인간의 운명이 영원히 고정됨을 가리키는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살아 생전 서로간 단절의 구렁은 사후에도 계속됨을 봅니다. 과연 나와 하느님 사이에는, 이웃간에는 관계 단절의 큰 구렁은 없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연미사의 은총이 큰 구렁을 메꿔준다 믿습니다. 마침내 죽은 이들 역시 정화과정이 끝난후 언젠가의 구원도 믿습니다. 이어 이승에 있는 남을 가족들의 회개를 위해 경고해달라는 부자의 청에 하느님을 대변한 아브라함의 답변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바로 성경이 가장 설득력있게 회개로 이끌어 주는 표징임을 보여줍니다. 정말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결정적 표징은 비상한 기적이 아니라, 성경 곧 하느님께서 일관되게 내리시는 회개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에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의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수도회와사도생활단 > 오늘의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