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신부] 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7-15 09:13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2026.7.15. 수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1221-1274) 기념일
이사10,5-7.13-16 마태11,25-27
‘하느님의 도구’가 됩시다
“희망과 겸손”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좋은 지침이 됩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세월에 따라 잡히지도, 세월을 거스르려 하지도 않고,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다산>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말을 듣는 법을 터득했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논어>
종파를 초월해 하느님의 도구에 손색이 없는 희망과 겸손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입니다.
지난 7월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 저와 같은 연배의 이 요한 수사와 권 베드로, 두 수도형제들이 왜관수도원에서 서원50주년 금경축 행사를 가졌고 상본의 성구와 삶의 이력을 통해 하느님의 도구로서 겸손과 순종의 아름다운 삶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조용하고 거룩한 삶 자체가 혼탁하고 길 잃은 세대에게 빛나는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깨어 있으시오.”(마르13,37)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성규72,11)
옛 자작시집을 펼치는 순간 <기다림>과 <희망>이란 두 편의 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시공을 초월 시적 진리는 언제 읽어도 공감하게 되고 현재성을 지닙니다.
“나무로
서서 기다리다가
바위로
앉아서 기다리다가
길되어
누워 기다리는 이 마음
당신은 아시는지요?”<2005.7. >
희망과 구원의 주님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기다림>이란 시요 이어 <희망>이란 시입니다.
“찌부듯한
흐리고 어둔 아침
환히 밝히며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줄기차게
끊임없이 희망으로 피어나는
능소화 꽃무리들”<2005.7. >
늘 거기 그 자리 해마다 끊임없이 피어나는 다양한 꽃들은 하느님께서 결코,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는 빛나는 희망의 표징이자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이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어제의 불행선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느님의 참 좋은 도구가 된 예수님이요 그의 제자들임을 깨닫습니다. 공관복음중 하나뿐인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찬양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똑똑한 이들은 역설적으로 십중팔구 영적현실에 눈먼 똑똑한 무지의 바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무지의 눈먼 똑똑한, 교만한 바보들로 차고 넘치는 세상입니다. 크게 어리석은듯하나 실은 크게 지혜롭다는 대우大愚가 대지大智라는 역설을 깨닫습니다. 짧은 시야로 실패인생 같으나 하느님의 시야로 볼 때 겸손과 희망의 표징이 된 아름다운 성공인생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고백이 그 비밀을 알려 줍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와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아버지를 닮아 겸손과 지혜, 희망의 빛나는 표징의 삶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됨보다 큰 영예와 축복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겸손한 하느님의 도구가 된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사야서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된 아시리아 제국입니다. 주님은 제 분수를 잊고 교만하게 날 뛰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아시리아에 대해 호된 질책과 더불어 재앙을 선언합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자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섬김과 순종으로 요약되는 겸손이 답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진정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바로 이의 좋은 모범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2창립자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학자입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천사적 박사라 칭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초 스콜라 신학에 쌍벽을 이뤘던 세라핌적 박사 성 보나벤투라 주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는 대조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계보에 가까운 인물로 신성한 신비에 대해 논할 때 순전히 이성적이 접근보다는 감정적인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두 성인입니다.
보나벤투라 이름의 전설적 유래도 흥미롭습니다. 심한 중병을 앓던 보나벤투라를 보는 순간 성 프란치스코는 “잘 왔노라(bona ventura)” 했다는 일화와 더불어, 병이 나았다는 소식에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는 전설적 일화는 두 성인간의 각별한 인연을 깨답게 합니다.
또 성 보나벤투라의 겸손에 관한 내용도 참 아름답습니다. 1265년 교황 클레메스 4세는 그를 요크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거절했고, 이어 12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알바노 추기경 주교로 임명하면서 거절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교황 사절들이 성인을 방문했을 때 성인은 피렌체 근처의 무젤로 수도원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는 일화입니다.
동시대인들은 성인의 온화한 예의, 자비심, 친근함을 두드러진 특성으로 꼽습니다. 성인은 1274년 52세 나이로 공의회 도중 세상을 떠나니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합니다. 두 성인 모두 “번아웃(burn-out)” 과로사라 할 수 있으니 참으로 100% 삶을 연소시킨, 얼마나 그 책임에 최선을 다한 삶이었는지 참 감동적입니다.
무수히 피어나는 야생화 들꽃들과 더불어 이런 꽃같은 성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역시 오늘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 겸손과 지혜, 회개와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빛나는 표징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89,1).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수도회와사도생활단 > 오늘의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