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신부] 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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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6-07-02 09:15 조회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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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7.2.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아모 7,10-17 마태 9,1-8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부르심에 충실한 ‘詩같은 삶’을 살자!”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새벽 인터넷을 여는 순간 일간지 1면 뉴스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수출, 올해 ‘꿈의 1조 달러’ 가능성...중,미,독이어 세계 4위 전망”, 솔직히 말 해 반갑지도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무지에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하는데 탐욕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솔직히 발전을 향해 <망서림>이나 <주저함> 없이 앞의 목표만 보고 돌진하는 삶이라면 너무 위태하지 않겠나 하는 우려도 많습니다.
과연 그만큼 국민 모두가 행복해지나? 날로 돈 중심의 삶에 복잡하고 바쁘고 피폐해지는 내면들이라면, 날로 자연도 사람도 망가져 건강도 잃고 병도 많은 세상이라면 도대체 그 많은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연 병들고 망가진 자연이요 사람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예나 이제나 여전히 언제나 묻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즉시 떠오른 답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시詩같은 삶을 살자”
예전 어느 목사님의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저의 즉각적인 답도 생각납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삶’이 바로 시詩같은 삶입니다. 어떻게 시같은 삶을? 시詩의 한자 말마디가 깊은 울림으로 와 닿습니다. 詩는 “말씀 언言자”와 “사원 사寺”자가 결합되어 있으니 詩는 그대로 <말씀의 사원>, 주님의 집 수도원을 지칭한다 싶습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자주 외우며 다짐하는 <꽃과 시>라는 시입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시같은 하루 시같이 살자”
날로 속화俗化되어 시가 사라져가는 삭막한 세상에 수도원뿐 아니라 <말씀의 사원>같은 시같은 신자들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삶이 불편하고 답답하고 힘들면 저절로 옛 자작시집을 펼쳐 보게 됩니다. 아주 예전 28년 전, 여기 수도원에서의 <시처럼 살고 싶다>라는 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詩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 위에
詩처럼
침묵의 여백의 時空안에
詩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詩처럼
살고 싶다”<1998.1.24.>
이어지는 시같은 삶을 희구하며, 꿈꾸며 쓴 <江같은 인생>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절망하지 말자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강처럼 흐르자
생명은 흐름이다, 흘러야 산다
저 흰 구름 흐르는
드맑은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나?
저 반짝이며 흐르는 푸르른 강이 보이지 않나?
하늘을 담고
유유히 흐르는 강같은
인생이라면
언제나 푸르른 젊음이리라
매순간 영원이리라
오늘도 내일도 흐르는 세월과 벗되어 살리라.”<2005.7. >
어떻게 이런 아름답고 자유롭고 자연스런 시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답은 오직 하나 주님을 만나,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삶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자 시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시가, 그림이 바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자연이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자연의, 사람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아모스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의 시>이자 <하느님의 시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저리도 당당함은 바로 주님께 불림 받았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드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이어 베텔의 사제이자 가짜 예언자인 아마츠야와 백성들을 향한 직설적인 예언으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참사람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중풍병자가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예수님을 만나 치유됨으로 전인적인 온전한 참나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을 보신 후 예수님의 직접적인 개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율법학자들의 반발에 개의치 않고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어 육신의 치유를 행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어 육신의 치유가 뒤따르니 전인적 치유의 기적입니다. 주님을 만나 운명의 질곡에서 벗어나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 부활의 온전한 새 삶을 살게 된 중풍병자입니다. 주님을 만나 용서받음으로 죄로 인해 무너진 영육의 균형과 조화의 회복입니다. 대부분의 병은 죄로 인해 삶의 균형과 조화가 깨졌을 때 발생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동료들의 믿음으로 용서와 더불어 전인적 치유를 받은 중풍병자처럼 우리도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전인적 치유를 받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영성체전 평화예식시 아름다운 한 대목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고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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